조선의 글과 그림은 종이ㆍ비단 따위를 붙여 미적 가치를 높임과 동시에 실용성과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적 서화처리법을 거쳐 족자ㆍ액자ㆍ병풍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 공예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배첩장(褙貼匠)”이라고 부르지요. 배첩장은 조선시대 초부터 제도화되어 도화서 소속으로 궁중의 서화처리를 전담하던 전문 기술자로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보유자는 서울시의 김표영 선생입니다.
배첩의 제작기법은 액자ㆍ병풍ㆍ족자ㆍ장정 그리고 고서화 처리의 다섯 가지인데 이 가운데 장정은 표지나 속지가 상한 고서 처리를 말하며, 고서화 처리는 높은 안목과 기술을 갖춘 배첩의 최고 경지로 분해-가(假)배접-세탁-배접의 과정이 있고, 경우에 따라 손상된 서화 부분에 붓을 대는 수정작업이 따릅니다. 표구는 배첩과 비슷한 말이지만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용어입니다.
![](http://www.solsol21.org/bbs/images/dcmr/13/bcj.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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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가운데서 골라 본 글)
371. 조선의 인기, ‘쌍륙놀이’가 잊힌 까닭 2005/07/05
“긴 봄날 우두커니 혼자 쌍륙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갑이 되고, 왼손은 을이 되어 ‘다섯이다!’. ‘여섯이야!’하고 소리치는데 너와 내가 있어 이기고 지는 것에 마음을 쓰게 되니 문득 상대편이 적으로 느껴집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있는 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쌍륙놀이’는 중국에서 생긴 것으로 우리나라에 고려 때 들어와 토착화된 것인데 궁중과 양반의 안방놀이였으며, 연암의 글과 혜원의 풍속도에도 등장할 정도로 조선시대 가장 인기있었던 놀이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이름조차도 잊혔습니다.
그렇게 잊힌 까닭은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조선문화 말살정책 때문입니다. 1936년 일본총독부는 전국의 민속놀이를 조사하여 ‘조선의 향토오락‘이라는 책을 냈고, 이후 쌍륙, 풍물굿 등 대중들이 좋아했던 것들을 모조리 금지시켰습니다.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흉계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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