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잘못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남명 조식(1501~1572)은 자신의 사직 상소문에서 임금과 조정을 날이 선 문장으로 과감하게 지적했습니다. 당시는 사화 시대이며, 임금의 외척이 온갖 횡포를 부리던 때였지만 남명은 이런 현실을 비판하는 선비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당시 이 상소문으로 ‘임금에게 불경을 범했다.’라며 남명에게 벌을 주자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대신이나 사관들이 ‘남명의 상소는 표현이 적절하지 못할 뿐 그 나라 사랑 마음은 높이 살 만하다.’거나, ‘남명에게 벌을 주면 언로가 막힌다.’라는 논리로 파문을 가라앉혔지요. 절대군주 시대 그것도 사화가 툭하면 벌어지던 때 있었던 이 일과 지금의 사회는 어떻게 다를까요?
조선시대 백성들은 중앙정부나 지방 수령, 그리고 지방의 토호들에 의해 경제적인 수탈과 피해를 자주 당하였다고 하지요. 그래서 1401년, 태종은 중국의 제도를 본떠서 백성들이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 신문고를 억울한 백성들이 제대로 두드릴 수 있었을까요?
신문고는 아무 때나 칠 수 없었습니다. 먼저 자기 고을의 수령과 관찰사와 사헌부의 순서대로 호소하고, 사헌부의 처리에도 만족하지 못할 때만 신문고를 치도록 했습니다. 이때 각 단계별로 전 단계의 관원에게서 그 사안을 처리했다는 확인서를 받아 제출해야만 다음 단계에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이 전해진 절차에 거쳐 신문고를 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지금은 청와대 누리집에 직접 호소할 수 있지만 이후 처리 과정에 만족하는 국민은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