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바닷가로 유배되었을 때에 밥상에 오르는 것이 상한 생선이나 감자ㆍ미나리 등이었고 그것도 끼니마다 먹지 못하여 굶주린 배로 밤을 지새우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예전 산해진미를 먹고 또 먹어 물릴 정도가 되던 때를 생각하고 침을 삼키곤 하였다고 실토합니다.
그는 그때 곧 1611년(광해군 3) 전국 8도의 음식과 명산지에 관하여 적은 ≪도문대작≫이란 책을 썼습니다. 허균은 책 이름을 《도문대작(屠門大嚼)》이라 한 뒤 “고기를 종류별로 나열해서 써놓고 가끔 보면서 한 점의 고기로 여기기로 하였다. 나는 먹는 것에 너무 사치하고 절약할 줄 모르는 세속의 출세한 사람들에게 부귀영화는 이처럼 무상할 뿐이라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다.”라고 책을 쓴 뜻을 밝혔습니다. “도문대작”은 ”푸줏간 앞을 지나가면서 입맛을 다신다.”라는 뜻으로 이는 실제로 먹지는 못하고 먹고 싶어서 먹는 흉내만을 내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
(지난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가운데서 골라 본 글)
773. 조선 초기엔 차를 별로 마시지 않았다 2006/08/17
“경연에서 공부하다가 차를 전매하는 법[각다법:搉茶法]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에서는 차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그의 단속을 엄히 하는가. 우리나라에서는 대궐 안에서도 차를 쓰지 아니하니, 좋아하는 것이 서로 달라서 이러하였다.” 하니, 시강관 김빈이 “중국 사람은 모두 기름진 고기를 먹으므로, 차를 마셔서 기름기가 빠져 나가게 하려는 것이며, 또한 손님을 접대할 때에도 반드시 차를 먼저 내고 나중에 술을 들여옵니다.”하였다.
위 글은 세종실록 중 세종 12년(1430년) 12월조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물론 조선 후기에 오면 다산, 추사, 초의선사 등 차에 푹 빠진 사람들이 있고, 선비들 사이에선 차를 마시는 것이 보편화되었지만 앞의 세종실록을 보면 조선 초기엔 차를 마시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 차는 기름진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들에게 좋은 기호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