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언제봤는지도 기억안난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기생충'이 간신히 1000만을 넘겼다. 개봉하고 나서 며칠 안되서 보았는데 블로깅을 미루다보니 이젠 당시 감정도 다 사라져버리고 기억도 다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간결했다. 가진 자의 삶과 가진 자에게 붙어서 살 수 밖에 없는 못 가진자의 삶. 여기에는 자존심? 인권? 사회 정의?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 고민하는 것은 사치스런 생각이었다.
한국 문화·사회사의 집적체.. 치밀한 연출로 '노골적 풍자' [한국영화 100년]
세계일보 2019.12.17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 지하 방과 대저택을 시각적으로 대비 / 계층간 갈등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아 / 별 뜻 없어 보이는 '짜파구리'·종북 개그 / 뒤틀고 변형해 사색의 지점으로 몰아 / 한국 최초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 100년 한국영화사에 새로운 장 열어
봉준호(50) 감독은 자신의 영화 ‘기생충’(2019)과 관련된 한 인터뷰(‘FILO’ 10호)에서 해외관객의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반응을 전해 준다. 독일 뮌헨 영화제에서 ‘기생충’이 상영될 때다. 현지의 독일 관객에게서 큰 웃음을 끌어냈던 것 중 하나는 영화 후반부에 기택(송강호)이 박 사장(이선균)네 집에 새로 이사 온 외국인 가족의 냉장고를 몰래 뒤지며 먹을거리를 찾을 때 나오는 대사라고 한다. “독일 얘들이라고 소시지하고 맥주만 먹는 건 아니던데?”
혹은 칸영화제에서 상영되고 나서 이탈리아 영화 배급업자들이 봉 감독을 찾아 감상평을 전할 때 그들이 특히 재미있어 한 건 ‘기생충’에 잔니 모란디라는 칸초네(이탈리아 대중 가곡) 가수의 노래가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봉 감독은 잔니 모란디를 “우리로 치면 남진, 나훈아 같은 국민 가수”라고 설명하며, 만약 우리가 “한국의 어느 예술극장에서 스웨덴영화를 보고 있는데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가 나오면 얼마나 당황스럽겠느냐”고 자문한다. 혹은 대만에서는 실제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대만 카스텔라’ 사업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이 있어 ‘기생충’을 보며 감정이입을 했다고도 한다.
기우(최우식·오른쪽)와 동생 기정(박소담)이 살고 있는 지하 방. 이들은 윗집 와이파이를 몰래 공유하려다 변기 앞에까지 와 있다. ‘기생충’ 곳곳에는 위와 아래, 상층과 하층이란 계층에 대한 의식이 깔려 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짜파구리’에서 ‘종북 개그’까지
독일의 소시지와 맥주, 이탈리아의 잔니 모란디, 대만 카스텔라가 각각 독일과 이탈리아와 대만의 사람들을 웃기고 울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답은 훤히 정해져 있다. ‘저 푸른 초원 위에’를 언급하는 봉 감독의 말 속에 답이 있다. 그것이 그들의 친숙한 문화사 혹은 중대한 사회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중대한 특성은 이렇게 예기치 않았던 해외관객의 반응 속에서도 에둘러 드러난다.
요컨대 그 특성이란 한국이라는 한 국가의 문화·사회사적 요소를 다양하고 밀도 있게 다루는 동시에, 단지 다루는 것을 넘어서서 마침내 그 문화·사회사적 요소들을 은연중 뒤틀고 변형해 우리를 당황스러운 사색의 지점으로 이끌고 간다는 데에 있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은 봉준호식으로 쌓아올린 한국 문화·사회사에 관한 하나의 기이한 집적체에 가까울 정도다. ‘기생충’은 한국영화 100년사를 맞은 역사적인 이 해에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한국영화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는데, 이 영화가 지닌 문화·사회사적 매력과 영향력도 수상에 큰 기여를 한 것 같다.
예컨대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 한 가지를 먼저 말해 보자. ‘기생충’에는 ‘짜파구리’란 신종 인스턴트 음식이 등장한다. 낯익은 특정 요식 상품 두 가지를 섞어 만드는 자급형 인스턴트 음식인데, 많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거나 먹어 봤거나 혹은 모르는 사람도 대강은 무엇인지 예측할 만큼 친숙하게 느껴지는 그런 것이다. 먹거리가 그다지 다양하지 않은 군부대의 장병들로부터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저렴하면서도 자극적인 음식을 즐기는 청소년들이 즐기기도 한다는 비교적 저급한 이 신종 인스턴트 음식이 대저택의 주방에서, 그것도 최고급 한우와 함께 조리될 때 우리는 다소 기이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음식으로서 짜파구리는 그저 짜파구리일 뿐이지만, 문화로서 짜파구리는 이 순간 더 이상 그냥 짜파구리가 아니라 무언가 찜찜한 아이러니를 낳게 된다. 우리 생활 속에 흔하게 혹은 주변적으로 존재해 온 것들이 ‘기생충’에서는 종종 이런 식으로 괴상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동반한 채 다시 등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 ‘기생충’의 잘 말해지지 않는 두 장면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제시카라고 속이고 엉터리 미술과외를 하려는 기정(박소담)이 박 사장네 현관문 앞에 서서 오빠 기우(최우식)에게 들려주는 일명 ‘제시카 송’은 한국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독도는 우리땅’의 개사다. 다만 ‘독도는 우리땅’이 독도가 한국의 역사적 영토란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작사·작곡된 것이라면, 기정의 경우에는 자신이 제시카가 아닌 기정이란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 노래를 개사해 부른다. 그러니까 현실에서는 사실에의 전파를 위한 것이고 영화에서는 속임수를 위한 것이다.
더하여 문광(이정은)과 근세(박명훈)가 기택의 가족들을 제압한 뒤에 기택의 가족을 향해 던지는 일명 ‘종북 개그’에는 사실상 따지자면 별 뜻 없어 보이지만 관객은 그 난데없이 튀어나온 개그의 습격만으로도 잠시 움찔하게 된다. 문광이 흉내 내는 북한 방송 아나운서의 말씨와 동작, 그리고 종북이란 말이 주는 껄끄러움 등이 뒤섞여 그 순간 영화는 한반도의 무거운 상황을 짐짓 상기시키는 듯하다가 다시 괴이한 이야기로 전개된다.
◆김기영에게서 배운 것, 봉준호의 가옥
‘기생충’에서 봉 감독이 시도하는 문화·사회사적 기획력은 앞서 제기한 사소한 아이러니보다 훨씬 더 치밀하다. 여기에는 한국영화사의 특별한 맥락도 함께 새겨져 있다. 요컨대 한국영화는 세기가 바뀌기 전까지만 해도 리얼리즘의 영향력 아래에서만 언급되곤 했다. 몇몇 리얼리즘 거장 감독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나면 그것으로 모두 설명된 것인 양 오해되곤 했다. 하지만 김기영이란 걸출한 이름이 발굴되고, 어쩌면 반리얼리즘이라 불러도 될 만한 내용과 형식의 한국영화사가 한편에서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었음이 입증되면서 그것에 존경을 보내는 후배 영화인들도 속속 생겨났다.
봉 감독도 그중 한 명이다. ‘기생충’에서 문광이 며칠간이나 버려져 많이 굶었을 남편 근세에게 급하게 음식을 먹일 때 하필이면 다른 것이 아닌 젖병을 물려 주는 건 너무 이상한 장면이다. 단지 근세의 약해진 소화력을 걱정한 탓만은 아닐 것이다. 젖병이 봉 감독의 청년기를 사로잡은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1919∼1998) 감독의 ‘육식동물’(1984)에서 온 기괴함이란 것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육식동물’에서 젊은 여인이 나이 든 남자를 아기 다루듯 하며 젖병을 물린다).
하지만 봉 감독이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김 감독만큼이나 봉 감독 역시 한국이란 이곳의 생활사를 영화적 상상과 비주얼의 근간으로 삼았다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 점에서 ‘기생충’의 가옥은 김기영 영화에 버금갈 정도로 주목된다. 가옥은 언제나 생활사 척도가 되는 한편 개인들의 은밀한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의 박 사장네 집. 예술작품 같은 구조의 넓고 세련된 가옥이다. 주인공 기우는 훗날 이 집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데 과연 그렇게 될 것인가?
CJ엔터테인먼트 제공
◆한국사회의 ‘위와 아래’를 비추다
‘기생충’의 가옥 구조 중 두 가지가 한국사회를 여실히 가리키고 있다고 지적돼 왔다. 첫째는 ‘계단’이다. 김기영 영화에서 주로 치정과 살인이 일어나는 것으로 유명한 이층집 계단, 그래서 한국의 기형적인 근대적 발전을 한눈에 보여 주기도 했던 그 계단은 ‘기생충’에서 여러 개의 것으로 분화하고 변형돼 동시대 한국사회의 계급과 계층의 문제가 첨예하게 뒤엉킨 장소로 태어난다.
둘째는 ‘지하실’이다. 기택 가족의 초라하고 눅눅한 방에서 시작된 ‘기생충’은 거대하고 세련된 박 사장 가족의 집으로 무대를 옮기며 진행되는데, 그때 봉준호 영화가 늘 매혹을 느껴 온 지하실, 즉 ‘플란다스의 개’(2000)에서는 도시 괴담의 진원지로, ‘살인의 추억’(2003)에선 사악한 공권력이 자행되는 고문실로, ‘설국열차’(2013)에선 강제노동을 당하는 아이들의 감옥으로 등장한 이 공간은 다시금 등장하게 된다.
‘기생충’에는 상층이 있고 그들 밑에 하층이 있고 그 밑에 더 하층이 있다. 그게 한국사회에 대한 감독의 생각이고 느낌일 것이다. ‘기생충’은 그 ‘위와 아래’를 시각적으로 현시해 낸다. 따라서 ‘기생충’에는 잊기 힘든 특별한 장면이 있다. 가까스로 박 사장 집을 빠져나온 기택 가족 세 사람이 폭우 속에서 자신들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그들은 박 사장 집을 나와 아래로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간다. 그래야 거기에 그들이 사는 지하 방이 있다. 하지만 기택 가족이 도착했을 때 커다란 불운은 예고된다. 그곳은 이미 ‘똥물’에 잠겨 있다. 이때 누군가는 우리들의 재해와 재난의 현실을 씁쓸하게 비춰 보기도 했을 것이다.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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