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라 좋은 내용으로 시작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작년 반성부터 해야 할 것 같네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말 시상식에서 꼭 지적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상을 받는 거의 다가, "이 자리를 빌어 OOO에게 감사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분들도, 그런 말을 많이 합니다. "올 한 해 많이 도와주시고...이 자리를 빌어 시청자/청취자님께 감사하고..."
아마, 올 초
행사장에서도, 그런 말이 많이 나올 겁니다. 그러나 '이 자리를 빌어...'는 틀린 말입니다.
최근에 맞춤법이 바뀐 게 18년 전인
1988년입니다. 그전에는 "이 자리를 빌어 OOO에게 감사하고..."라는 말이 맞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빌다'에
1. 남의
물건을 도로 주기로 하고 가져다가 쓰다.
2. 남의 도움을 보수 없이 그냥 힘입다
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빌리다'는,
"도로 찾아오기로 하고 남에게 물건을 얼마 동안 내어 주다"로 '빌다'와 '빌리다'를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1988년 맞춤법을
바꾸면서, 일상에서 잘 구분하지 않고 구분하기도 힘든 이 두 단어를 '빌리다'로 통일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빌다'에는,
1.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하여 달라고 신이나 사람, 사물 따위에 간청하다.
2. 잘못을 용서하여 달라고
호소하다
3.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다.
는 뜻밖에 없습니다.
물건이나 생각을 주고받는다는 뜻은 없습니다. 또,
어디에도 "이 자리를 빌어 OOO에게 감사하고..."에 쓸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빌리다'는
1. 남의 물건이나 돈
따위를 나중에 도로 돌려주거나 대가를 갚기로 하고 얼마 동안 쓰다.
2. 남의 도움을 받거나 사람이나 물건 따위를 믿고
기대다.
3. 일정한 형식이나 이론, 또는 남의 말이나 글 따위를 취하여 따르다.
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3에 나온 뜻을
따르는 예를 보면, 성인의 말씀을 빌려 설교하다 /그는 수필이라는 형식을 빌려 자기의 속 이야기를 풀어 갔다. /신문에서는 이 사건을 고위
관리들의 말을 빌려 보도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어부의 말을 빌리면 토종 어종은 거의 씨가 말랐다고 한다. /강쇠의
표현을 빌리자면 씨가 안 먹는 말이라는 것이다.처럼 쓸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좀 길었는데요. 정리하면, 인사말을 할 때 흔히
말하는 "이 자리를 빌어..."는 틀리고, "이 자리를 빌려..."가 맞습니다.
제가 우리말 편지를 쓰고 있으니까, 이 편지를 빌려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자고 외치고 싶습니다. 아니 외칩니다. ^^*
[고소하고 담백하다]
어제는 저녁 늦게 아내와
함께 대형 할인점에 가서 시장을 좀 봤습니다. 저는 그런 할인점에 가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공짜로 얻어먹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한 가게에 들렀더니, 아주머니가 “고소하고 담백한 OOO!” “일단
드셔보세요~~~!”라면서 손님을 끌더군요.
고소하고 담백하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인데, 흔히 그렇게
씁니다.
‘고소하다’는 “볶은 깨, 참기름 따위에서 나는 맛이나 냄새와 같다.”는 뜻입니다. 반면,
‘담백하다’는 “음식이 느끼하지 않고 맑다” “밍밍하고 싱겁다”는 뜻입니다. 곧, 맹물에 조약돌을 끓인 게
담백한 것입니다.
이렇듯 맛도 없고 심심한 게 담백한 것이고, 참기름 냄새가 나는 게 고소한 것인데, 이걸 어떻게
같이 쓰죠?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도, 방송에서도 자주 나오고, 일반 사람도 자주 말합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